2026-05-19 마음나누기

올 블랙 데이

올 블랙 데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검다. 검정팬티, 검정 티셔츠, 검정 양말, 검정 면바지, 검정 셔츠, 검정 안경, 검정 운동화, 검정 마스크까지 나를 두르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검다. 심지어 시계 줄과 스마트폰 케이스까지 검정이다. 오늘은 나의 올 블랙 데이다. 우연히 겹치고 겹쳐서 어떤 필연을 만들어내는 그런 날이 있다. 올 블랙 데이는 그런 날이다.
나는 불필요한 고민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벼운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작은 루틴을 만들어 놓고 그대로 따른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옷을 입는 것이다. 나는 거의 비슷한 디자인의 바지와 셔츠를 색만 다르게 하여 갖춰 놓는다. 속옷도 같은 디자인을 색만 다르게 구매해둔다. 그리고 이것을 돌려서 입는다. 그렇게 하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매일 새로움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옷을 입고 다니다가 특이한 패션이 만들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을 두르고 있는 모든 옷이 검은색이 되는 우연이었다. 옷을 입으면서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뭔가 그럴듯한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로 했다. 회사에 출근할 때 신는 신발까지 완전히 검은색으로 맞춘 것이다. 원래 그날은 파란색 스니커즈를 신는 날이었는데 검정 슬립온을 신고 출근하였다.
모조리 검은 옷을 입고 출근했던 날, 특별히 기억할만한 어떤 일이 생겼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날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다만 그날을 경험하는 나는 무언가 다른 어쩐지 새로운 것 같이 느꼈다. 묘한 익숙함과 생소함이 종일 작은 설렘을 유발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별건 없었지만 무언가 그럴듯한 기대가 되는 하루였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평범한 일상에 양념을 뿌리는 방법을 하나 알게 되었다. 기회가 있을 때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이다. 옷의 색을 검정으로 맞춘다든지, 향수를 특이한 것을 사용한다든지, 특별한 장난감을 가지고 회사에 출근한다든지 등의 작은 생소함을 평범한 일상에 투여하고 그것을 설렘으로 즐겼다.
여하튼 올 블랙 데이는 나의 일상의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 작은 것일 지라도 삶에 큰 변화를 준 시작이었기에 특별히 기념해서 어쩌다가 2~3가지가 겹쳐서 검은색 옷이 어느 정도 숫자 이상이 될 것 같은 억지로 전체를 검은색으로 맞추려고 했다.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올 블랙 데이는 자주 오는 날은 아니었다. 두어 달에 한 번 겨우 오는 우연이다.
어떤 올 블랙 데이에 있었던 일이다.
작은 생소함에서 오는 상서로움을 즐기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쩐지 그걸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는 이런 걸 즐기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좋은 장난감을 자랑하고 싶은 아이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날은 회사에 출근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패션을 자랑하면서 나의 모든 것이 검다고 자랑을 했다.
그리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나는 생소하고 상서롭다고 느꼈던 것이 다른 이에게는 별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검정은 유행이 지났어.”, “애도 아니고 뭐한 짓이야?” 등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딱 한 사람만 빼고는 말이다.
유일하게 한 사람, 나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해준 사람은 다니던 회사의 팀장이었다. 그는 “오, 검정은 모든 색의 여왕이라고 하던데, 너는 패션을 잘 아는구나. 대단하다.”라고 해주었다. 다른 이의 부정적인 피드백에 우울했던 나의 기분이 단번에 좋아졌다. 특히나 과거 백화점 명품 판매장에서 VIP 접대를 전문으로 했었던 팀장의 칭찬이어서 더 그랬다.
약간 우울할 뻔했던 나의 기분은 계속해서 좋아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난 올 블랙 데이를 기념하고 그날의 패션을 할 수 있으면 하는 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 내가 회사를 옮기게 되었을 때, 고민하지 않고 그 칭찬을 해준 팀장이 있는 곳으로 선택하는 이유가 되었다. 사람은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 밑에서 일해야 편한 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
오늘이 바로 그 올 블랙 데이다.
그러니까, 음, 역시, 그걸 말해야 하는데,
오늘의 내 팬티색은 검정이다.
그리고 난 남자다. 남자 속옷 색을 알아서 뭐가 좋을까 싶지만, 그냥 적어봤다.
from 무상
사족: 글을 조금 더 열심히 적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