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9 마음나누기

결국은 나서게 되더라.

결국은 나서게 되더라.
출근길이었다. 지하철 안이었다. 1호선이다. 지하철이 살짝 연착되어서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것 같았다. 걱정되는 터라 팀장에게 전화해서 몇 분 정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유튜브 동영상이라도 볼까 하는데 거슬리는 사람이 보이더라.
덩치 큰 남자가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다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앉아 있었다. 양옆에 할아버지 한 분,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는데 많이 불편해 보였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포르노를 보고 있었다. 지하철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걸 다 알 수 있었다. 소리를 최대한 크게 틀어놓고 있었으니까.
보기 거슬렸지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출근하는 중이었고, 조금 늦었고, 마음이 급했고, 이제는 직장인이니 회사 밖에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는 것이 사회생활의 미덕이라고 들었고, 말했고, 생각했고, 동의했고, 결심했으니까.
그 사람이 거슬리니 누군가 지하철에 민원을 넣었던 것 같다. 곧 지하철 내부에서 전체 방송이 나왔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시는 분은 이어폰을 사용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방송이 나오자 지하철 내부의 대부분은 이제 그가 소리를 줄이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방송을 듣고 따를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소리로 그런 민망한 방송을 틀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가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자, 그 옆의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소리 좀 줄여요. 방송 못 들었어요?” 나는 할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절대 그냥 들을 사람 같지가 않았거든. 그는 “뭐야?!”라며 할아버지에게 성을 냈다. 할아버지에게만이 아니었다. 옆에 앉은 할머니에게도 화를 냈다. 할머니의 몸을 툭 치면서 할아버지를 위협하는 게 보기 그랬다.
나서면 안 되는데, 얼마 전에 친구에게 그런 일이 있으면 빠지라고 말도 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툭, 진짜 툭, 그러니까 알아차렸을 때는 내 입에서 “소리 좀 줄여 주세요.”란 음성이 나오고 있었다. 이 말을 하면 일이 커질 걸 알았는데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분노가 모두 나에게 향했다.
“넌 뭐야! 이 개XX(인간과 친한 포유류에게 입양이 되었다.)가 어디서 나서고 지X(여름 유행병에 걸려 몸이 부들거리는 모양을 하게 되었다.)이야!”
저런 인간은 말리면 더 화를 내고, 더 폭발할 확률이 높다. 다짜고짜 비속어가 튀어나오면 그렇게 보는 게 맞다. 나는 조용히 자리를 뜨려고 했다. 흥분한 사람에게 그 원인이 되는 대상이 가까이 있으면 더 흥분하니까. 그런데 그놈이 그걸 막았다. 정확하게는 그놈의 행동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옆에 있는 할머니와 그놈 앞에 서 있던 할머니를 밀치며 “왜 옆에 있고 지X이야 꺼져!”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내가 빠져 버리면 진정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 거 같았다.
나는 출근 중이었다. 심지어 약간 늦은 상황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이 상황에 끼지 않고 그냥 피하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에게 말했다.
“그만 하세요. 더 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아마도 그는 경찰과 사이가 안 좋았던 거 같다. 경찰이란 말에 분노가 터져 나왔으니까. 그는 달려들어 내 얼굴을 쳤다. 안경은 날아갔고, 마스크는 벗겨졌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두 대는 맞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스마트폰으로 112에 신고를 했다. 그는 내가 신고를 하는 것을 듣자 다시 흥분해서 달려와 주먹질을 해댔다.
나는 두 손을 들어서 그의 주먹질을 그대로 맞았다.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다. 다섯 대에서 여섯 대 정도를 맞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 상황을 그대로 112 신고 센터의 직원들이 전해 들었다. 그의 두 번째 폭행은 지하철로 들어온 경찰이 어디 있냐는 전화를 걸어왔을 때 이어졌다. 경찰과 통화하는데 발길질이 날아왔다. 하늘색 블레이저 재킷에 그놈의 발자국이 남았다. 그 와중에 나는 “저는 저 사람을 때리지 않았고, 가만히 맞고만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보셨는데 혹시 증인이 되어 주실 분이 계신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 할아버지와 젊은 대학생이 내게 전화번호를 주었다. 그가 무언가 다시 행동하려고 할 때 지하철 보안관이 나타났다.
그의 미친 행위는 거기서 끝났다.
그 사람과 함께 역 사무소에 갔고, 신고에 출동한 경찰들과 파출소에 갔고, 파출소에서 조서를 확인한 후에 경찰서에 갔다. 거기에서 조서를 확인하는 동안 그는 나를 죽이겠다, 과거에는 주먹 한 방에 사람을 죽였는데 왜 안 죽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말을 했다. 두어 시간을 그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결국 그가 유치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회사는 이미 한참이나 늦었고, 혹시 몰라 병원에 가야 해서 아예 연차를 써버렸다. 다행히 그에게 잘(?)맞아서 약간의 찰과상은 있었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전치 1주 정도. 진단서는 따로 필요 없을 거 같아서 그냥 두었다.
집에 돌아와서 조용히 상황을 돌아보니 별생각이 다 들더라.
그 와중에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왜 나섰을까?”였다. 결국, 처음에 예상한 대로 나는 하루의 시간을 날렸고, 약간의 물질적 손해도 보았다. 아마도 분명히 안 나서는 게 내게는 더 편했을 상황이었다.
근대도 결국을 나서게 되더라.
그나마 내가 좀 잘살아왔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내 몸이 다친 것에 대해서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내가 나선 것에 대해서 잘했다고 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일 거다.


from 무상
사족: 나름 아주 힘든 일이 있어서 블로그는 1년이나 타인에게 대여했습니다. 그 덕에 상처받으신 이웃도 있고, 걱정해주시는 이웃도 있고, 실망하시는 이웃도 있었네요. 다시 돌아왔고, 이제는 어려운 상황이 좀 지난 지라 다시 활동하려고 합니다. 다시 지난번 같은 일이 없을 겁니다. 열심히 살아야죠.
사족 둘: 블로그에 남아 있는 광고의 잔재는 계약상 6월 28일까지 남겨두고 그 뒤에 삭제할 수 있습니다. 그 날 되면 바로 지울 생각입니다.